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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체의 전환으로 동일한 브랜드 '중차패'로 운영하던 4개의 차창은 다음과 같은 브랜드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곤명차창 -  중차패 (中茶牌)

맹해차창 -  대익패 (大益牌)

하관차창 -  송학패(松鶴牌), 보염패(寶焰牌), 남조패(南詔牌)

보이차창 -  보수패(普秀牌)

 

('패(牌)'는 중국어로 브랜드를 뜻합니다.)

 

4개의 중국 국영 푸얼차창은 1975년 중국의 계획경제체제 아래 중국차엽총공사(中國茶葉悤公司)는 4개의 대형 차창에

다음과 같은 일련번호를 부여 합니다.

 

곤명차창: 1, 맹해차창: 2, 하관차창: 3, 보이차창 : 4

 

이제는 각각의 차창에 대한 역사 및 특징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우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보이(普洱)차창'은 1975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이미 유명세를 떨친 곤명, 맹해, 하관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차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차창은 수출용 푸얼차를 전담하여 생산하였는데 특히 보이차창에서는 '산차(散茶)'형태인 푸얼차만을 생산하였답니다.

보이차창에서 출하된 차품에는 '4'자가 적혀 있습니다.

 

 

보이차창은 1994년 '보수(普秀)' 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상표 등록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10년뒤인 2004년 회사규모가 커지자 '운남보이차그룹유한공사(雲南普洱茶集團有限公司)' 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또다른 시대를 시작하였답니다.

 

 

 

 

곤명차창(昆明,쿤밍차창)

 

 

곤명차창의 전신은 복흥실험차창(复興實驗茶廠)으로 1939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복흥패(复興牌)' 라는 브랜드로 차를 생산하였고 '타차'가 이들의 주력상품이였습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1년 뒤인 1950년 정부가 중국차 시장에도 관여를 하면서 곤명차엽가공창(茶葉加工廠)으로 명칭을 바꾸고 찻잎의 가공과 관리 업무에 몰두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곤명차창이란 명칭은 10년뒤인 1960년에 붙혀진 이름으로 원래는 중차공사(中茶公司) 소속의 계열사 였습니다.

곤명차창하면 빠질 수 없는 일화가 있는데 바로 오늘날 우리가 소위 말하는 '숙차' 제다 기술 이랍니다.

1950년대에 운남에서는 '숙차' 제다 기술이 없었습니다.

당시 광동차창에서는 '숙차' 제다법을 연구개발 하여 홍콩 등 지역으로 수출 하였습니다.

곤명차창에서는 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맹해, 하관차창의 사람들과 함께 총 7명의 연구개발자를 광동차창으로 보냅니다.

이들은 광동차창에서 '숙차'제다법을 배워 운남으로 돌아오지만 광동의 기후조건에 적합한 광동차창의 숙차제다법은 끝내 운남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구진은 운남 기후조건에 적합한 숙차제다법을 연구를 거듭하여 완성하게 되었고 그 유명한 숙전7581을 생산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가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로 1992년 곤명차창은 사실상 '파산'을 선언합니다.

곤명차창은 문을 닫게 되지만 차창 내부 인원들은 생계를 유지 하기 위해 소위 '프리랜서'스타일의 비즈니스로 차창을 운영하였고 2006년 푸얼차가 떠오는 샛별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자 곤명차창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되었고 재개 하였습니다.

현재 곤명차창은 곤명(昆明)에 위치하고 있으나 그 유명한 숙차를 생산하는 차창은 서쌍판납(西雙版納) 맹해현(縣)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맹해차창(勐海,멍하이차창)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는 4대 차창 중 하나인 맹해차창은 엘리트 집단이 만든 차창 이랍니다.

1938년 중국은 차산업 부흥을 위해 인원을 선발하여 프랑스 파리대학 등 해외 명문대와 중국 국내의 명문대로 파견을 하였습니다. 

약 90여명의 기술연구원들로 이루어진 이 엘리트집단은 맹해현(勐海縣)에 차창을 만들고 1940년 정식으로 생산라인을 가동하였습니다.

당시 맹해는 불해(佛海)라는 지명을 사용하였고 자연스럽게 맹해차창의 전신은 '불해차창' 이 되겠습니다.

 

1951년, 곤명차창처럼 맹해차창은 국가 정부 주도 아래 운영되었고 1952년부터 정식으로 다시 차를 생산하였습니다. 당시 맹해차창에서는 홍차를 생산하였고 모차(毛茶)를 비롯하여 가이흥(可以興)등 개인차창의 긴압차를 구매하여 판매하는, 생산자가 아닌 판매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맹해차창의 명칭은 '중국차엽공사불해차창(中國茶葉公司佛海茶廠)' 이였습니다.

1963년 차창은 운남성맹해차창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계획경제로 인해 1984년 이전에 맹해차창에서 생산한 수출용 차와 내수용 차는 모두 곤명차창(중차공사)에 인수되어 재수출 되었습니다.

 

1982년 맹해차창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고 1985년 맹해차창은 홍콩남천공사(南天公司)의 요구에 따라 8582생차와 8592숙차를 생산하게 됩니다.

1988년 맹해차창은 팔달(八達)과 포랑산(布朗山) 지역에 자체 운영 다원을 형성하였고 1년 뒤인 1989년 '대익'이란 브랜드로 상표등록을 하였는데 이는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의 '중차패' 상표 사용 비용 지불에 대한 대책으로 맹해차창 자신만의 사업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4년 운남박문투자유한공사(雲南博聞投資有限公司)가 맹해차창을 인수하였고 맹해차창은 운남대익차업그룹(雲南大益茶業)에 소속 되어 있습니다. 

 

맹해차창에서는 다양한 스테디셀러를 만들었는데 대표적으로 7572, 7542 등이 있습니다.

 

 

 

하관차창(下關/시아꽌차창)

 

 

강장차창(康藏茶廠)은 하관차창의 전신으로 1941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되기 전 강장차창을 비롯하여 하관지역의 차창들은 많은양의 차를 가공하였는데 티베트, 곤명, 중경(重慶), 홍콩, 싱가포르, 인도, 미얀마 등지로 수출하였습니다.

1950년 강장차창은 중국차엽공사하관차창(中國茶葉公司下關茶廠)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55년 영창상(永昌祥) 등 하관지역의 개인차창들이 하관차창과 합병되었습니다.

1994년 하관차창은 운남차엽진출구공사와 중경차엽공사 등 5개의 대형차창들과 함께 운남하관타차(그룹)유한공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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