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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Baroque]  

 

바로크라는 것은 포르투갈어의 barroco<(비뚤어진 모양의 진주>의 뜻)에 유래하는 말이며, 원래는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고전주의 입장에서,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의 밸런스가 결여된 동적인 예술표현에 대한 경칭으로서 이용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독자적인 양식으로서 그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 양식을 대표하는 것은 17세의 건축이나 건축장식이며 그것이 회화조각에서 음악에 이르는 예술양식 일반, 나아가서는 널리 동일한 색채를 가진 문화사상의 형태까지도 가리키게 되었다.

 

세계관으로서의 바로크문화사상의 원리로서의 바로크는, 한편으로 <반종교개혁>운동에 의해서, 또한 지방에서는 <과학혁명>이 가져온 동적 우주상에 의해서 체현되고 있다.

 

 

예수회

 

반종교개혁이라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의 타격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가톨릭에 대항해서 행한 자기개혁자기탈피의 기도이며 운동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중세원리의 근대화, 신의 인간화라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과의 혼재, 원리적인 비틀림이 있으며, 그것이 오히려 전환기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에너지를 낳고 있다.

 

그런 가톨릭바로크를 대표하는 것은 가끔 바로크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예수회이다. , 중세적 가톨릭에서는 완전한 신앙에 대한 도달은 신비적인 황홀 중에서 신과의 합일에 의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보통의 인간과 그런 초월적 상태와의 사이에는 가교하기 어려운 단절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예수회의 가르침에서는 그런 완전한 상태에 대한 도달이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훈련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종래는 초자연적 영감에서만 구해진 힘이 인간의 의지에 주어지게 되었다. 예수회의 개조 이냐시오 로욜라는 <나는 언제이든지 자신이 원할 때 하나님(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도, 또한 신체가 <나아가고, 걷고, 달린다>로서 훈련되듯이, 의지도 훈련에 의해서 <신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유의지의 긍정과 중시는 예수회를 욕망의 해방의 시대에 어울리는 활동적 집단으로 하였는데 그 활동 중에는 새로운 자연연구의 장려도 있으며, 상거래의 촉진도 있었다.

 

 

장세니즘

 

그렇지만 정신사적으로 보아서 적어도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가톨릭바로크의 원천으로서 장세니즘이 있었다. 장세니스트들은 예수회 수도사와는 정반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수함을 시대의 현실에서 스스로 소외함으로써 유지하고, 높이고자 한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신에 의한 <창조> , <원죄> 이전에는 순결과 조화의 상태에 있었는데, 아담이 범한 잘못은 신의 권위를 버리고 지혜의 나무열매를 선택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의 본성=자연은 부패변질하고, 그것이 유전과 연대책임에 의해서 후의 세대까지 전해졌으며, 이렇게 해서 신을 떠난 인간의 비참함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세 가지 리비도,  <감각의 리비도(육체)>, <지혜의 리비도(호기심)>, <우월의 리비도(권세욕)>이며, 현재 인간은 이들 근원적 사욕에 의해서 구원받기 어려우며 오만하게 되어 있다. 이 장세니스트의 가르침은 인간의 자연성을 격렬하게 규탄하고 있지만, 이처럼 자연성을 문제로 해야 하는 점에 역시 근대적 가톨릭으로서의 비틀림이 있는 것이다.

 

 

코스모스의 붕괴

 

거기에서 이번에는 과학혁명이 가져온 동적 우주상인데, 이는 코페르니쿠스, 브루노,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서 담당되었다. 이 동적 우주상은 과거의 정적 우주상으로서의 <코스모스>의 붕괴, 즉 완결해서 질서있는 것으로서의 우주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코스모스로서의 우주라는 것은 공간적 배치가 가치와 완전성에 대한 계층질서를 체현하는 유한한 우주(지구 중심의 천동설적 우주)이며, 이를 대신하는 것은 무제한의, 나아가서는 무한의 우주(지동설적 우주)였다. 원래 이 우주상의 전환은 과학적으로 직선적으로 행하여진 것이 아니라, 과학과 신앙 사이에선 여러 가지 논의를 거쳐서 행하여졌다. 또한 지구를 포함한 혹성의 공전이 궤도가 완전한 원이 아니라, 태양을 하나의 중심으로 하는 타원이라는(케플러) 것도 그때까지의 완전성의 관념을 돌파한 것이었다.

 

파스칼

그러면 바로크 사상이 반종교개혁과 동적 우주상이라는 두 개의 대응하는 측면을 가진 것이었을 때, 그들 두 개의 측면을 겸비한 것으로서 부상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장세니스트였던 파스칼이다. 팡세 중에 보이는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전율하게 한다>라는 말이나, <두 개의 무한>의 중간자로서 인간이 자각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장세니즘[Jansénisme]   

17, 18세기 프랑스의 종교, 정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종교운동. 이름 그대로는 신학자 얀센(프랑스명 장세니우스)이 주장하고 로마교황에 의해서 단죄된 은총에 관한 교의를 가리키는데, 얀센 지지자(장세니스트)들은 그런 의미에서의 장세니즘은 실체가 없는 환영이라고 하고, 교회 당국 나아가서는 국가권력에 저항했다. 따라서 장세니즘은 단순히 얀센의 교설의 틀을 넘어서 장세니스트들의 신앙, 사상, 행동의 총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환언하면 그것은 은총에 관한 신학사상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실천과 도덕상의 엄격주의, 나아가서는 교회조직 내측에서의 개혁을 지향하는 교회론과 그에 따른 실천운동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장세니즘의 복잡함과 다양성이 있다.

 

 

 

 

 

  바로크(Baroque) 시대 음악 

'바로크'란 말의 어원은 포르투갈어로서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음악사에서는 1600 년 전후부터 요한 세바스챤 바흐가 죽던 때까지를 일컫는 시대의 한 문화조류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팽배해져서 점차 시민계급을 성장시켰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합리적인 관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이것을 적용하여 카메라타 일원인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와 카치니(G. Caccini) 15451618)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단성음악의 선율반주는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는데 이것은 작품전체를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통주저음(Basso Continuo)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통주저음은 저음부 아래에 화음을 지시하는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저음(Figured Bass)이라고도 부른다.

 

 

17 세기와 18 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 전개되었으며 이탈리아 음악가들의 국제적인 활약으로 인해 세계를 대표하는 음악으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음악용어들 중 상당부분이 이탈리아 어로 되어 있는 이유가 이 시대의 음악가들의 활약으로 인한 때문이다.

 

18 세기에 이르러서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한 기악합주 음악이 눈에 띄게 발전되는데, 코렐리의 '크리스마스 협주곡' '라폴리아(La Folia)', 알비노니의 '아다지오(Adagio)', 비발디의 '화성과 창의에 대한 시도',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파헬벨의 '카논' 등이 대표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들 중 비발디의 '화성과 창의에 대한 시도'는 그의 작품 8 의 협주곡집 중 제 1    4 번까지를 각기 '',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부제와 그 내용을 설명한 단시(소네트)가 붙어 있는 '사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협주곡으로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 5  '운명'과 더불어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은 음악의 색체적인 효과를 중요하게 여기고 반음계적 화성을 많이 사용하였다는 점으로 이러한 음색의 대비는 협주양식을 탄생시키게 된다. 즉 강음과 약음의 격동적인 교체, 화성 적인 부분과 음계 적인 부분의 교체, 두텁고 단단한 합주부와 경쾌하고 부드러운 독주부의 교체,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의 교체 등 대비적인 효과에 음악가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이러한 대비적인 요소가 면면히 이어지는 음악사 속에 중요한 요소로 뿌리를 내려 현대음악까지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크(Baroque) 시대 음악 

 

바로크 시대는 대략 1600~1750년경을 풍미하던 웅장하고 극적이며 활력 있는 예술정신으로 대표된다. 17세기가 시작되면서 음악사에서 아주 극적인 전환점이 이루어진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광범위한 음악 어휘를 요구했고 새로운 기법들이 특히 성악음악의 분야에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음악 어휘의 확장으로 종교음악과 세속음악, 성악어법과 기악어법 사이의 구별이 명료해졌고, 각 나라들의 민족적 차이도 뚜렷해졌다. 17세기에 걸쳐 이전까지 선율 및 화성의 기초로 작용해온 중세 선법이 점차 장조·단조 조성음악 체계로 대체되었고, 음의 이러한 조성 원리는 장차 1900년경까지 계속 서양음악의 중심 원리로 작용했다. 새로 대두된 조성음악 체계는 장조·단조 음계로부터 유도되는 서로 관계되는 일련의 음·화음과 대조되는 조성에 기초했다. 이 시대의 음악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크게 2개의 새로운 혁신에 따라 이전 르네상스의 음악과 구별됨을 알 수 있다. 그중 하나인 콘체르타토 양식은 성악·기악의 대조, 결합, 교대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인 계속저음(basso continuo)은 첼로나 바순과 같은 베이스 악기와 건반악기 혹은 류트에 의해 처리되었다.

 

이 시대에 새로 대두된 가장 전형적인 것은 그리스 비극의 음악적 이상과 실제를 재창조하고 모방하려는 뜻에서 피렌체의 귀족 문예집단인 카메라타가 고안한 오페라였는데 이들을 지배한 철학은 음악보다 가사를 우위에 놓는 것이었다. 이들은 음악의 기능이 가사의 극적인 의미를 강화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 모노디 양식이 탄생했다. 모노디는 원래 말의 리듬을 반영한 독창인 레치타티보와 그에 비해 선율적 성격이 강한 아리오소, 그리고 장식적인 노래인 아리아를 탄생시켰고 계속저음으로 반주되었다. 카메라타에서 고안된 모노디 양식 및 기법은 이탈리아 전역에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이어 전 유럽에 퍼졌다.

 

1620~30년대에 오페라 활동의 중심지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겨졌는데, 로마 오페라는 합창과 극적인 볼거리 춤이 여기저기 포함되었으며 칸초나 양식에 의한 서곡을 사용한 점 등이 특징이었다. 10년 정도 지나자 베네치아가 오페라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1637년 이곳에 최초의 대중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베네치아 오페라는 대중 취향의 영향을 받아 대중적인 노래와 극적인 볼거리, 팡파르와 같은 짧은 서곡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혁신들을 새로 도입했다. 또한 청중이 감동적인 선율을 원했기 때문에 아리아와 레치타티보가 명확히 구별되었다. 바로크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마지막으로 오페라 문화가 꽃핀 곳은 1670년대 나폴리였다. 나폴리의 오페라 세리아는 고대 역사나 신화에서 인물을 가져온 진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으며 100여 년에 걸쳐 유럽 오페라를 휩쓸었다. 오페라 세리아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반복으로 이루어졌고 가수의 화려한 기교를 요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밖에 첫째 클라비어·오르간·류트로 간단히 반주되는 레치타티보 세코와 관현악단 전체로 반주되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가 구별되었다는 점과 둘째 이탈리아 서곡의 확립을 들 수 있다. 신포니아라 불리는 당시의 서곡은 3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18세기에 교향곡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초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나폴리 오페라 작곡가는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이다.

 

동시대에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는 오페라가 주로 궁정에 소개되었다. 1647년 루이지 로시의 오르페오 Orfeo가 파리에서 공연된 이후부터 이탈리아 오페라는 점차 프랑스의 중요한 극 형식인 발레와 섞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후 프랑스 오페라에서 춤이 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크 시대 프랑스 오페라의 또 다른 특징은 느린 악장과 빠른 악장으로 이루어졌고 종종 처음 느린 악장이 반복되는 프랑스 서곡이다. 이탈리아 서곡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서곡은 이후 오페라에서 독립되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오페라의 대가는 장 바티스트 륄리와 그의 후임인 장 필리프 라모였다. 독일은 30년전쟁의 사회적·정치적 격동으로 프랑스에 비해 오페라 활동이 미온적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이탈리아 양식에 거의 전적으로 지배되었으며 함부르크·뮌헨·드레스덴·빈 등이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였다. 영국에서는 음악극 형태인 가면극이 성행했는데 이 가면극은 점차 이탈리아 오페라와 섞이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상황과 비슷했다. 18세기에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가 영국을 휩쓸기 전에 활동한 주요작곡가로는 헨리 퍼셀과 존 블로를 들 수 있다.

 

나폴리 오페라의 주도적인 작곡가들은 그밖에도 칸타타라는 양식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독창과 기악반주에 의한 세속 성악곡에서 시작한 칸타타는 세속음악과 종교음악 사이의 양식적 차이가 줄어들자 빠른 속도로 교회음악용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특히 루터 교회의 예배음악으로 쓰인 독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바로크 시대 기악음악의 형식과 악기는 전시대와 거의 동일했지만 새로운 악기가 부상함에 따라 이전 악기가 덜 쓰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예로 극음악의 저음반주를 위해 계속 쓰이던 류트는 급속도로 하프시코드로 대체되었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악기인 오르간은 옛 형태를 계속 발전시켜나갔다. 기악음악의 새로운 주요형태는 소나타와 협주곡이었는데 소나타라는 말은 원래 칸초나에서 유래된 기악합주곡을 지칭하는 말로, 이후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까지 기악음악을 대변하는 악곡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건반 소나타는 소규모 합주용으로 2성부 구조를 이루었고, 독립된 일련의 악장들(흔히 느림-빠름-느림-빠름의 순서)로 발전하게 되었다( 색인 : 실내 소나타, 교회 소나타). 이중 가장 중요한 형태는 트리오 소나타인데 2대의 바이올린(혹은 플루트나 오보에), 첼로, 계속저음을 담당하는 악기로 구성되었다 ( 색인 : 트리오 소나타). 악기구성은 소나타와 같고 규모가 큰 경우에는 명칭을 달리했는데, 관현악 전체로 연주할 경우에는 신포니아(혹은 콘체르토), 소편성 독주악기들과 관현악이 교대로 연주할 경우에는 합주협주곡, 독주악기와 관현악이 교대로 연주할 경우에는 독주 협주곡(솔로 콘체르토)이라 불렀다 ( 색인 : 합주협주곡). 협주곡의 기본 원리는 기악 편성 그룹들간의 대조와 짜임새의 대조였다. 바로크 시대를 통틀어서 건반악기 음악이 융성했다.

 

기악합주 음악은 실내악과 관현악 모두 이탈리아에서 가장 융성했고, 특히 볼로냐에서 꽃을 피웠다. 이탈리아 기악합주 음악은 당시 다른 유럽 작곡가들의 작품에도 영향을 끼쳤다.

 

바로크 시대의 절정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 1750)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의 작품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두 작곡가는 모두 독일의 비슷한 지역에서 태어나 루터 교회의 전통에서 자라났으며 또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 둘은 여러 가지로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각기 다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헨델은 주로 극음악 작곡가로 명성을 날려, 특히 영국 활동 시기 이후에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세속 칸타타를 많이 작곡했다. 반면 바흐는 평생 고용 음악가로 활동하던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교육자로 헌신한 것에도 영향을 받아, 수난곡과 교회 예배용 칸타타, 예배용 오르간곡, 연습용 하프시코드곡 등을 다수 작곡했다. 헨델과 바흐의 작품은 기법으로 볼 때 모두 조성체계 확립의 절정을 이루었다. 한 조성에서 다른 조성으로 조바꿈이 가능해졌고, 특히 이것이 형식 구성의 원리로 사용되었다. 풍부한 반음계적 화성 어휘가 이러한 변화의 근거이자 또한 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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