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1950년대 초반 부산 동광동 뷔엔나 다방 골목. 김형찬 제공

대중음악은 그 시대의 역사다. 평범한 민초는 대중음악을 들으며 그 시절을 웃고 또 울면서 보냈다. 본지는 새해부터 대중음악 저술가 김형찬 씨의 '김형찬의 기록으로 보는 대중음악 이야기'를 매주 연재한다. 김 씨는 지난 20여 년 간 모은 3만 여장의 사진과 동영상, 방대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우리가 자세하게 알지 못했던 그 시절 음악 뒷이야기를 전한다.

- 부산 '밀다원''금강' 서울 '에덴'…
- 6·25 시절 예술인 사랑방으로

- 지인들 안부 묻고 즉석 작업까지
- 이중섭 은박지 그림 이때 탄생
- 염세주의 만연에 자살도 잇따라

1961년 서울 인사동 르네상스 다방(왼쪽이 김만복 당시 서울교향악단 상임지휘자).

21세기 현재의 음악 감상은 거의 모두 디지털 방식이다. 음반도 재생기기도 따로 필요 없이 각자의 휴대전화로 음원사이트에 접속해 거의 무한대의 음악을 손쉽게 듣는 세상이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행하는 음악을 듣는 가장 중요한 공간은 다방(혹은 음악다방)이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음악이라는 콘텐츠는 다방이라는 인프라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 알콩달콩했던 역사를 몇 회에 걸쳐 소개한다.

한국 최초의 다방은 1923년께 서울 종로 2가 부근에 화가와 영화인들이 함께 주머니를 털어서 만든 '멕시코'라는 다방이었다. 다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처음부터 지식인이나 문화예술인들의 집합처였기 때문에 그들이 좋아할 만한 고급스러운 클래식음악이 필수요건이었다.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서울 명동에 생기기 시작한 다방은 '봉선화' '마돈나' '에덴' '휘가로' '돌체' '모나리자' 등이 있었고 부산은 피란시절부터 대표적인 문화사랑방이었던 '밀다원'을 비롯해 '금강' '에덴' '스타' '천연장' '비원' 등이 중요한 클래식 음악다방이었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다방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9·28 서울 수복 이후 서울 명동에 상업업소 중에 다방이 서둘러 먼저 문을 연 이유는 흩어진 사람들의 소식을 알 수 있게 했고, 임시 사무실 역할을 했으며 갈 곳 없는 이들이 하루를 소일하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다방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람의 마음을 클래식 음악으로 위로해주었고 서로가 상처난 가슴들을 내보이고 위로하며 힘든 세상을 버텨나갔던 가장 인간적인 치유의 공간이었다.

1957년 문을 연 부산 광복동 고갈비골목의 아폴로 다방.

1950년대는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허무주의, 염세주의가 사람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다방에서 음악을 듣다가 자살한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부산 피란시절 남포동의 '스타' 다방에서 음독자살한 시인 전봉래, 1951년에는 부산 '밀다원'에서 시인 정운삼이 음악을 들으며 유서를 쓰고 음독할 때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슬픈 사연도 있었다. 1956년에는 서울 인사동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을 매일 드나들던 문대위라는 군인이 세상을 비관하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자살 하는 일까지 있었다.

문화예술인 혹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경영했던 음악다방은 자연히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여기는 곧 문화예술인들의 창작소가 되었다. 1960년 서울 종로의 르네상스에서는 작곡가 윤이상의 작품발표회가 열렸으며 1959년 부산의 '아폴로'에서는 11세 소년 백건우의 피아노 독주회가 열리기도 했고 '밀다원'에서는 작곡가 윤용하가 시인 박화목과 만나 유명한 가곡 '보리밭'을 만들기도 했다. 화가들은 술에 취해 흥이 오르면 즉석에서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밀다원에서 화가 이중섭은 다방 구석에 앉아 유명한 은박지 그림들을 그렸고 백영수는 피란지에서의 개인전을 이곳에서 열었다. 시인들은 자신의 시론을 펼치며 제자들을 거느렸고, 작가들은 원고 청탁을 받고 글을 썼다. 1955년 김동리는 밀다원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밀다원시대'를 발표해 밀다원이라는 음악다방이 1950년대 문화예술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는지를 증명했다.

1950년대 음악다방에서 문화예술인들이 들었던 클래식음악 때문에 그들은 1950년대적 정서를 지니게 됐다. 즉 '순수음악'에 대한 지나칠 만큼 경직된 태도는 일체의 다른 유행음악을 허용하지 않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진지한 감상태도는 정서를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고 안으로만 침잠하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거운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은 '아폴로' 다방은 1957년 광복동 미화당백화점 4층에 열었던 '미화당음악실'을 경영했던 박용규가 그 해 '미화당음악실'을 그만두고 곧 광복동 뒷길의 고갈비 골목에 있던 ESS학원 건물 2층에 열었던 음악다방이었다. 1960년대에 부산에서는 시청 앞쪽에 '고전음악감상실', 충무동에 '오아시스'와 같은 음악다방에 있었고, 에덴공원의 숲속에는 '강변'이 문을 열어 낙동강변의 분위기 속에서 음악을 감상했다. 그 이후 '아폴로'는 문화극장 뒤편과 광복동 입구로 자리를 옮겨가며 이름도 '칸타빌레'라고 고쳤지만 1970년대로 접어들자마자 문을 닫았다. 1980년대는 창선동에서 '필하모니'가 문을 열어 클래식 음악감상실의 명맥을 유지했지만 3년을 못 가고 문을 닫고 말았다.

728x90
,